국내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하지만 그 능력만큼은 가히 지금까지도 독보적이라 할만큼 천재적이었던 소.녀.
물론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미지만큼은 언제까지나 소녀였던 장.덕.

솔직히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좋아했던 가수로서 나중에 자료들을 찾으며 접한 기억이 더 많을 정도니까..







78년이었나, MBC 서울국제가요제에 처음 등장한 장덕은 당시 나이 16세에 불과한 어린 소녀였다.
가수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진미령에게 큰 인기를 가져다준 곡인 '소녀와 가로등'의 작사/작곡가로 함께 무대에 섰는데 이미 30여곡 이상의 노래를 만들어놓았을만큼 장덕의 재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서울국제 가요제는 참가자와 함께 작곡자가 함께 무대에 오르는 규칙이 있었는데 장덕은 3년 연속 수상가수의 작곡가로 함께 무대에 서는 영광을 보여줬다.

중3때부터 작사/작곡을 했던 장덕은 어린 나이에 음반 프로듀서로서의 능력까지 인정받을 정도로 음악에 있어서는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했다.
그녀의 음악적인 감각은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인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감정의 전달이 충분할만큼 시간을 초월한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당시 이은하는 창법의 변화까지 갖는 모험을 할 정도로 장덕의 곡에 흠뻑 빠졌었다.
이별의 슬픔을 울부짖는게 당연했던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고 슬픔의 감정을 가슴에 감추고 절제하는 창법을 요구했던 장덕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그 노래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부모의 이혼,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살았지만 동양사상에 빠진 아버지, 음악에 빠진 오빠 사이에서 늘 혼자 집을 지켰던 장덕은 그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날렸던게 아닌가싶다.
이후 오빠인 장현과는 현이와 덕이라는 이름으로 연예계 신고를 했고 하이틴 영화에 출연까지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싶은 욕심에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지만 결혼생활에 대한 우울함과 향수병등으로 다시 귀국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떠난 유학생활동안 국내 가요계의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던 장덕은 귀국 후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고 그저그런 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솔로앨범 5장, 베스트앨범 1장, 현이와 덕이 앨범 1장..
맞나?
그 중 난 3집의 '사랑하지 않을래'와 4집의 '얘얘' 를 즐겨 들었었다.
지금에서야 장덕의 슬픔과 아픔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활동할 당시의 동그란 눈, 깜찍한 외모, 귀여운 웃음 등 그 녀의 이미지에 맞는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무튼,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그 녀를 작사/작곡, 프로듀서로의 능력에 가수로의 능력까지 더해 큰 인기를 가져다준 곡은 4집의 '님 떠난 후' 였다.
아시안게임이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1986년, 내가 국민(초등)학교 3학년 때의 노래다.
물론 그래서 장덕에 대한 당시의 인기를 내가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또렷하게 이 노래가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던만큼 많이 부르고, 들렸던 노래였음은 틀림없다.

나 혼자면 어때요, 난 아직 어린걸~
슬퍼지면 어때요, 울어버리면 되지~
떠난 님이 그리워, 방황하고 있어요~
미워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








'J에게'로 등장한 이선희의 인기몰이에 버금갈 정도로 장덕 역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거기에 다른 여가수들과는 다른 귀여우면서도 예쁜 외모까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가수가 아니었나싶다.

잠깐 언급한 현이와 덕이 얘기를 해보자면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노래는 '나 너 좋아해, 너 나 좋아해' 일 것이다.
한국의 카펜터스로 불리며 함께 불렀던 남매는 당시 혼성듀엣으로선 음악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팀이었다.
장덕이 솔로 음반까지 발표하고 본격적인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면서 오빠 장현은 자신의 음악 무대였던 음지를 벗어나 기획사와 계약하며 동생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이혼한 부모, 그리고 밖을 나돌던 아버지덕에 두 남매는 어려서부터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인지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80년대 후반,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수많은 신인 가수들의 등장과 급격하게 변해가는 가요계의 현실에 장덕의 음악은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고 조금씩 잊혀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발생한 오빠 장현의 암 판정.
장덕은 그로인해 오빠와 오빠 가족들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되었고, 우울증이 재발하며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고 한다.

결국 1990년, 장덕은 스물아홉이라는 나이로 오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만 알려져있다.
어쩌면 진짜로 그녀의 재능을 부러워한 신이 질투를 하여 자신의 곁에 두고자 그렇게 서둘러 데려간 것은 아닐까.. 

언제부턴가 장덕을 이야기 할 때면 빼놓지 않는 것 중 하나가 그녀의 마지막 노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한 제목과 가사...







그러나 불운하고, 우울하고, 불행했던 한 사람의 음악가로, 여성 음악가로만 이야기되는 것은 장덕의 팬으로서 솔직히 반갑지는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그 녀의 천재적인 능력과 감각이 불운, 불행, 우울, 수면제 등의 단어에 이대로 묻혀지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부턴가 유재하의 노래가 많이 불려지고 그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에 많은 조명이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더 재조명되고 더 천재적이라고 불려야 할 사람은 장덕이 아닐까?
만능 엔터테이너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싱어송라이터는 물론 프로듀셔로까지 활동하는 여성 음악인을 찾기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렇기에 장덕의 죽음은 더 안타깝고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내 나이가 장덕을 기억하고 이야기 하기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실제와 다른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지적 부탁드립니다.






 

설정

트랙백

댓글